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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피엔스』를 읽기 전, 나는 이 책이 단순히 인류의 진화와 역사에 대한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했다. 뼈와 화석, 연대기, 유명한 문명의 탄생 같은 이야기를 나열하며, 우리가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일종의 교양 역사서쯤으로 여겼다. 하지만 막상 책을 펼치고 몇 장을 읽어 내려가자, 그 생각이 얼마나 단순했는지를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사피엔스』는 단지 ‘과거’를 설명하는 책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가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으며, 이 삶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날카롭게 파헤치는 책이었다. 그리고 그 출발점이 ‘상상’이라는 단어라는 점이 나에겐 정말 낯설면서도 강하게 다가왔다.

     

    『사피엔스』는 왜 읽어야 할까 (상상, 문명, 인간)

    1. 인간은 상상을 통해 현실을 만든다

    책은 인류의 여러 종 중 왜 호모 사피엔스만 살아남았는지를 설명하면서 시작된다. 단지 도구를 잘 만들고, 불을 사용할 줄 알았기 때문은 아니었다. 『사피엔스』는 그 핵심을 ‘인지 혁명’에서 찾는다. 인간은 약 7만 년 전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을 믿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 부족, 신, 국가, 권리, 돈, 기업—all 우리가 익숙하게 여기는 개념들은 실제로는 물리적인 실체가 없지만, 사람들이 믿기 때문에 강력한 현실이 되었다. 이걸 ‘상상의 질서’라고 한다. 나는 이 부분에서 멈춰 서서 한참을 곱씹었다. 정말 그렇다. 돈은 종이에 불과한데도 우리는 그것으로 집을 사고 음식을 먹는다. 나라는 지리적 경계에 불과한데,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지키려 한다. 어떤 신념이나 가치도, 결국은 집단이 함께 믿어야만 유지된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실재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허구 위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허구는 우리 삶의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다. 책은 단순히 ‘허구를 믿는 능력’이 문명을 만들었다는 이야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우리가 얼마나 이 상상의 질서에 종속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법, 제도, 경제, 정치, 종교, 사회 구조… 이 모든 것이 결국 허구지만, 그 허구가 없으면 우리는 거대한 사회를 유지할 수 없다. 이걸 깨닫는 순간, 나는 내가 믿고 있던 세상에 대해 완전히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2. 농업과 과학이 주지 못한 행복

    책은 인류의 역사를 세 가지 주요한 혁명으로 나눈다. 인지 혁명, 농업 혁명, 과학 혁명이다. 그중 농업 혁명에 대한 해석은 내게 신선함을 넘어 충격에 가까웠다. 학교에서 배운 농업 혁명은 인류가 정착하고, 문명을 이루는 기초를 다진 긍정적인 사건이었다. 하지만 하라리는 전혀 다른 시선으로 이 전환점을 바라본다. 농업은 인간을 더 편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고단한 존재로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수렵 채집 시절 인간은 비교적 다양한 식단을 누리고, 병에 걸릴 확률도 낮았으며, 하루 몇 시간만 일해도 생존이 가능했다고 한다. 하지만 농업이 시작되면서 인간은 날씨와 환경에 종속되었고, 몸은 노동에 시달리며, 질병과 영양 불균형에 노출되었다. 식량은 늘었지만, 삶의 질은 떨어졌다. 이 주장에 나는 처음에는 반감을 느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무시할 수 없는 논리였다. 발전은 늘 대가를 요구했고, 우리는 그 대가를 ‘당연한 삶’이라 여기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과학 혁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많은 것들—치료 기술, 통신, 정보 접근, 이동 수단—이 모두 과학의 힘이다. 하지만 하라리는 그것이 인간을 더 행복하게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오히려 기술은 인간을 더 많은 소비와 경쟁 속으로 몰아넣었고, 인간의 감정과 가치마저 데이터와 알고리즘으로 분석하려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 과학은 세상을 더 편리하게 만들었지만, 그로 인해 우리는 더 복잡한 문제를 마주하고 있다. 자연은 파괴되고, 공동체는 약화되고, 삶은 개별화되었다. 결국, 인간은 ‘무엇이 더 나은 삶인가’를 묻기보다, ‘무엇이 더 빠르고 효율적인가’만을 고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3. 믿음으로 유지되는 사회, 그리고 인간의 모순

    『사피엔스』는 우리 사회의 구조가 철저히 믿음에 기반하고 있음을 반복해서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믿음은 대부분 ‘상상’으로부터 출발한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며, 인간이 가진 ‘집단적 환상’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실감했다. 나라가 존재하는 이유, 돈이 통용되는 이유, 어떤 규칙이 지켜지는 이유—이 모든 것이 수많은 사람들이 같은 것을 믿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단순하지만 무섭도록 현실적이었다. 또한 책은 ‘행복’에 대해 집요하게 묻는다. 우리는 지금 과거보다 훨씬 편리한 시대에 살고 있지만, 그만큼 더 행복한가? 하라리는 이에 대해 명확한 답을 내리지 않는다. 다만, 생물학적으로 보았을 때 인간의 행복은 호르몬의 작용으로 결정되며, 환경의 변화가 꼭 감정의 질을 바꾸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짚는다. 실제로 현대인은 더 많은 자유와 자원을 누리지만, 우울증과 외로움도 함께 늘고 있다. 책의 후반부로 갈수록 나는 점점 무거운 감정과 마주하게 되었다. 인간은 상상을 통해 협력하고 문명을 만들었지만, 그 상상을 절대화하면서 새로운 억압과 고통도 함께 만들어냈다. 종교가 전쟁의 도구가 되었고, 국가는 분열과 배제를 조장했으며, 자본은 인간을 숫자로 환원시켰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의 가장 큰 능력인 상상력은 가장 큰 무기가 되기도 했다. 나는 이런 인간의 모순이 이 책이 가진 가장 깊은 주제라고 느꼈다.

     

    『사피엔스』는 단지 지식이나 정보를 제공하는 책이 아니었다. 읽는 동안 계속해서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게 만들었다. 나는 무엇을 믿고 살아가고 있는가? 내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들은 정말 스스로 선택한 믿음인가, 아니면 누군가에게 학습된 환상인가? 그리고 이 믿음들은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가? 이 책은 그 어떤 정답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에게 스스로 질문할 수 있는 힘을 준다. 나는 『사피엔스』를 덮고 나서도 계속해서 생각하게 된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과연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그리고 나는 그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지금까지 내가 읽은 책들 중에 이렇게 오랫동안 머릿속에 남아, 삶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꿔놓은 책은 드물었다. 『사피엔스』는 단지 인간의 과거를 말하는 책이 아니라, 나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책이다. 그 점에서 이 책은 내게 단순한 역사서가 아니라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하나의 거울이 되었다. 인류가 만들어낸 이 허구의 질서 속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이 질문이, 『사피엔스』가 내게 남긴 가장 큰 울림이다.